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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큐레이터의 눈 (90) 우성(又誠) 김종영 탄생 100주년을 맞는 소회(所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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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의 눈

(90) 우성(又誠) 김종영 탄생 100주년을 맞는 소회(所懷)



김종영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김종영 탄생 100주년 기념전’ 전시 전경


김종영 탄생 100주년 기념전 - 불각의 아름다움, 조각가 김종영과 그 시대(2015년 5월7일~8월28일 김종영미술관)

- 서울대미술관(2015년 5월7일~7월26일)
- 경남도립미술관(2015년 9월10일~12월9일) : 김종영미술관과 서울대미술관 전시를 통합, 재구성한 내용. 김종영은 창원 태생

  필자가 대학교 2학년이던 1982년 12월 어느 날 과사무실에 들어갔을 때가 기억난다. 뭔지 모르지만 침통한 분위기였다. 김종영선생이 돌아가셨단다. 김종영선생은 필자가 입학하기 바로 전 해인 1980년 8월에 정년퇴직하여 학교에서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무덤덤하였다. 그런 필자가 김종영선생 30주기가 되던 2012년 김종영미술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어느덧 만 3년이 되어간다. 그때 우성 김종영 기념사업회에서는 김종영 탄생 100주년기념전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2014년 7월부터 2015년 6월까지 1년 동안『의학신문』에『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이라는 제목의 글을 24회에 걸쳐 연재하게 되었다. 이 글을 연재하며 필자는 우성 선생이 남긴 작품, 자필원고, 유품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고명한 미술사학자분들이 쓴 우성 선생에 관한 글과 12편의 학위논문, 그리고 친구와 제자들이 쓴 추억담과 유족의 증언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성 김종영이 어떤 인물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김종영, <자각상>, 왼쪽부터 1964년, 1971년, 1980년 작
 

  우성 김종영 하면 떠오르는 것이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먼저 그는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 그는 탁영濯纓 김일손(1464-1498)의 후손답게 그의 이름 앞에는 ‘선비’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추구한 미학은 ‘불각(不刻)의 미’로 알려져 있다. 추상조각, 선비, 불각의 미! 그래서 인지 미술인에게 조차 조각가 김종영 하면 범접하기 어렵고 난해한 작가라는 선입관이 있다. 특히 그의 삶에는 나혜석,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권진규와 같은 극적인 드라마가 없다. 그는 1941년 동경에서 귀국 후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부임하기까지 고향 창원에 칩거하였다. 1980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32년간 그는 오로지 학교와 집을 왕래하며 작업과 교육에만 몰두한 삶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고(故) 이경성은 1975년 회갑을 맞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동문회 주최로 개최한 김종영 개인전 도록 서문에서 김종영을 ‘양괴(量塊)에서 생명을 찾는 미의 수도자’라고 하였으며 ‘과작(寡作)의 작가’라 하였다. 하긴 ‘회갑전’이 김종영의 생애 첫 개인전이었으니 그가 김종영을 과작의 작가라 하여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동경 유학시절 청년 김종영은 휘문고보 동기이며 당시 하숙을 같이 하고 있던 철학도 박갑성에게 하루는 어느 호숫가를 거닐며 거두절미하고 “예술도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하네.”라고 말했다니, 이경성이 김종영을 ‘미의 수도자’라 한 것 또한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김종영 탄생 100주년 기념전’ 전시 전경 중 유실 작품 아카이브(1950년대)


  ‘과작의 작가’ 김종영은 유실된 작품을 포함하여 228점의 조각 작품을 제작하였다. 더불어 미술관은 드로잉 작품 2,769점, 서예작품 약 1,000점을 소장 관리하고 있다. 그런 그가 동년배 작가와 남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많은 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가 대학노트, 수첩, 그리고 원고지에 남긴 유고 중 일부는 사후 제자들에 의해『초월과 창조를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의 글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20세기 한국미술계가 서화에서 미술로 전환되는 시대에 그는 조형예술의 본질 전반에 관해 성찰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생동안 다른 종류의 글쓰기인 ‘서예’에 정진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자신이 서예를 한다는 것을 외부에 일절 알리지도 않았고, 전시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그의 조각과 드로잉만 주목하였고 서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일생을 통해 제작한 작품수와 글의 양을 헤아려보면 그는 자고 식사하는 시간을 빼고는 오로지 사색하고 글-‘원고’와 ‘서예’-쓰고, 작업하고 그리고 교육에만 전념하였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는 생전에 작업하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라 하였다. 그 이유는 손을 쉬는 시간은 잡생각과 투쟁하고 생활을 고민해야 하는 괴로운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그가 예술에 전념하여 살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헌신적인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김종영, <자화상>, 왼쪽부터 1937년, 1940년대, 1950년, 1964년, 1975년 작


  ‘김종영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추상조각에 전념하게 되었을까?’ ‘서예와 추상조각을 어떤 관계로 봐야 할까?’ ‘그에 대한 연구에서 어떤 부분이 미흡하였을까?’ 필자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고, 의학신문 원고를 쓰며 이와 같은 의문들을 풀어나가야만 했다.

  김종영은 정년퇴임하던 해인 1980년 4월, 조각가로는 최초로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였다. 이때 김종영은 자신의 조각 작품집을 발간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일생동안 제작한 조각 작품 목록을 연도별로 꼼꼼하게 정리하여 수록하였다. 그리고 그는 도록 뒤에『자서自書』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요즘 말로 하면 작가 노트를 실었다.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개성이나 창의에 대한 개념이 너무도 단순하여 한 작가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종합적인 역량이나 예술성을 면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가 왜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것일까?「작가의 이기심」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글에서 그는 이 시대가 한 작가의 종합적인 역량이나 예술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현대예술이 개성을 지나치게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지나치게 개성이 중요해진 이유는 예술작품이 상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품은 소비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눈에 띄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술가는 작가의 도덕성보다는 상인의 이기심에 기울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김종영탄생 100주년 기념전’ 전시 전경 중 ‘공공조형물 아카이브’


  그렇다면 그에게 개성이나 독창성은 어떤 것일까? 그에 따르면 그것은 기법의 특이성이 아니고 오랜 수련과 경험을 통해 다다른 자각과 달관의 경지에서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작가의 예술에 대한 평가는 그 작가가 달관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인격과 의지, 그리고 성실성에 가치를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흠모한 완당과 세잔느를 비교 성찰하며 얻은 결론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입고출신(入古出新)하는 과정에서 개성과 독창성이 형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호 ‘우성(又誠)’은 새로운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1980년 김종영이 정년퇴직을 하며『대학신문』과 가진 인터뷰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미술대학은 천재적인 소질을 갖춘 화가나 조각가를 키워내는 곳이 아니다. 학생들은 항상 도서관에서 책을 대하고, 작업실에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대하면서 예술의 의미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그는 후학들에게 천재형의 예술가이기 보다는 노력형의 예술가가 되기를 당부하였다. 더불어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고 끊임없이 예술의 본질에 대해 성찰할 것을 강조하였다.



김종영, 조모상(왼쪽, 1936년), 소녀상(오른쪽, 1930년대 말)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그의 예술과 작업관은 서예에서 추구하였던 ‘법고창신(法古創新)’에 기초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法古創新’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入於有法(입어유법) 出於無法(출어무법) 我用我法(아용아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데, 김종영이 지천명 되던 1964년 1월 1일 일기에서 그가 我用我法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을묘생(乙卯生)은 오십이라는 나이를 탄식한다. 생각하면 오십은 노인으로 행세하는 나이다. 어언간 오십이 되었고 덧없이 오십이 된 셈이다. 지금까지의 제작생활을 실험과정이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종합을 해야 할 것이다. 조형의 본질, 형체의 의미 등에 관한 그 동안의 실험을 종합할 수 있다면 오십이란 연령은 결코 헛된 세월은 아닐 것이고 목표에 한걸음 가까워지는 셈이 될 것이다. 늙어지는 것이 한편으로 얻어지고 목적에 도달하는 도정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본격적으로 김종영 자신의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결실이 1975년 개최된 생애 첫 개인전인 ‘회갑전’이었다. 한편 환갑이 거의 다된 나이에도 그는 겸재의 그림을 방작(倣作)하였으며, 1973년 늦가을에는 안진경의「爭座位稿(쟁좌위고)」를 임서(臨書)1)하였다. 이를 보면 그는 추상조각에 전념하면서도 계속해서 전통 서화에도 몰두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는 ‘미술’을 하면서도 ‘서화’를 놓지 않았다. 



서울대미술관에서 펼쳐지고 있는 ‘김종영 탄생 100주년 기념전’ 전시전경


  한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부임한 이듬해인 1949년 새해 첫날 서른네 살의 김종영은 두보杜甫의『丹靑引贈曹將軍覇(단청인증조장군패)』의 한 대목인 “丹靑不知老將至(단청부지노장지) 富貴於我如浮雲(부귀어아여부운)”을 서예작품으로 남겼다. 내용인 즉슨 ‘그림 그리느라 늙어감도 모르나니, 나에게 부귀는 뜬 구름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각도인(刻道人) 김종영이라 썼다. 그리고 이 글을 회갑이 되던 1975년 초파일에 그린 자화상에도 썼다. 그러니 두 작품사이의 시간의 간극(間隙)을 고려하면 그가 작가로서 얼마나 초지일관한 삶을 살았는지 쉽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종영 탄생 100주년 기념전 전시전경. 왼쪽부터 새(1953년 제2회 국전 출품작), 전설(1958), 꿈(1958).



  한 예로 1960년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설립되어 동상제작 붐이 일었다. 조각가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당시 작가추천을 담당했던 고 임영방이 회고하기를 김종영에게 동상제작을 권유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나는 사실적인 것을 못하네.” 그만의 점잖은 거절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직후인 1966년 그는『채근담』의 글을 서예작품으로 남겼다. “得趣不在多(득취부재다) 盆池券石間(분지권석간) 煙霞具足(연하구족) 會景不在遠(회경부재원) 蓬窓竹屋下(봉창죽옥하) 風月自賖(풍월자사)” 풀어보면 ‘정취는 많은 것에서 얻는 것이 아니니 좁은 연못과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연기와 안개가 깃든다. 좋은 경치는 먼 곳에 있지 않으니 오막살이 초가집에도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이 스민다.’는 내용이다. 그가 청빈한 삶을 추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습자부문 출품작(왼쪽) 및 장원 트로피(오른쪽)


  그가 태어난 1915년은 고희동이 동경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해이다. 그리고 휘문고보 2학년 김종영이 동아일보사가 주최한『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중등부 습자 부문에서 안진경체로 쓴「원정비(元靖碑)」로 전국 장원을 하던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예와 사군자는 퇴출되었다. 묘한 인연이다. 그러니 김종영의 100년이 한국미술의 100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시대에 선비 조각가 김종영이 있었다.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습자부문 장원 상장


  그는 1980년에 자신이 쓴 글『자서』의 대미를 “예술의 목표는 통찰”이라고 썼다. 그동안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김종영이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였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연구논문들은 형태의 유사성에 기초한 특정작가와의 영향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그를 서양미술의 잣대로만 재단(裁斷)2)하고 평가하려 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본다. 그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관점을 달리해 그가 꿰뚫어 본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통찰해야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의 ‘종합적인 역량’을 통찰하지 못하였던 것 아닌가 반성해 본다. 
 
  김종영의 많은 자료가 미술관에 너무나 잘 보존되어있다. 이 자료들을 살펴보며 필자는 100주년 기념전시를 계기로 김종영과 그 시대를 통찰하여 새롭게 20세기 한국미술사 연구가 전개되어야 함을 자각했다. 이제 시작이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2015. 8. 10 ⓒA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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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옳고 그름을 따져 결론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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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 at : 2015/08/11 10:55:31 Posted at : 2015/08/04 17: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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